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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 익산시 문학관·생가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사진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의 문학관·생가입니다. 주변 음식점과 숙박 정보도 함께 확인해 보세요.

구분
문학관·생가
지역
익산시
주소
전북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관리기관
익산시청 역사문화재과
문의
063-859-5791
이용요금
무료입장

소개

이병기 선생 생가는 사랑채의 건물이 고풍인 선비의 가옥으로, 국문학자이며 시조작가로서 우리 고전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이병기선생의 가족이 누대를 살아온 목조초가집이다. 건물은 조선말기의 형식으로 안채와 행랑채, 헛간, 모정과 연못 등이 있다.지방기념물(地方記念物) 제 6호로 지정되어 있는 가람 이병기 생가는 금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논산 쪽으로 가다보면 여산면 소재지 못 미쳐 신리교차로에서 집입하며 대형버스도 생가앞까지 갈수있다.이 집은 수우제(守愚齊)라고 하는데 그 곳에는 ㄱ자형인 고패형으로 된 안채와 1자형인 사랑채, 고방채와 승운정(勝雲亭)이라는 모정 등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잡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진 안채는 안방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너방과 안방을 좌우로 두고, 부엌은 안방의 일부와 이어 달려 있다.안방 석축에는 칸을 막아서 찬방을 차리었으며 건너방의 측면과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수우제(守愚齊) 진수당(鎭壽堂) 등의 현판이 걸려 있는 4칸의 사랑채는 서로부터 2칸이 사랑방, 한 칸의 부엌, 그리고 한 칸의 서재로 구성되었으며, 정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3칸의 고방채는 광, 헛간, 안 변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의 뒤에는 장독대가 있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었는데 새마을 운동 때에 기와로 개량하였다가 다시 초가로 환원하였다.모정인 승운정 앞쪽으로는 자그마한 연못을 파 놓았다. 연못은 안쪽을 자연석을 이용하여 가지런히 석축을 쌓아 올렸다. 연못을 둘러싼 묵은 산수유와 배롱나무가 더욱 선비의 운치를 자아낸다.건물 자체에는 이렇다 할 특징은 없으나 조촐한 선비의 가옥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크지는 않으나 옹색하지도 않은 집채, 여름철이면 몇 그루의 파초가 늘어서는 동구 밖, 정자와 함께 산수유와 배롱나무로 둘러싸인 연못, 마당 한편에 놓인 맷돌과 절구통, 안채 뒤의 장독대, 집 뒤의 대밭에 이르기까지 선비 집의 은근하고 담백한 생활의 멋을 한껏 느끼게 한다. 스스로 술복, 제자복, 화초복의 세 복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처했던 가람의 집답게 넓지 않은 집안임에도 사철 돌아가며 꽃과 잎을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잘 자리 잡고 있다.지금도 누구나 여기에 들리면 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집들에서 느끼는 썰렁한 분위기가 아니라 마루에 걸터 앉아 한가롭고 따스한 햇볕을 쪼이면서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고, 모정에 마주 앉아 동동주라도 마시고 싶은 친밀감을 주는 집이다가람 이병기 선생은 1891년 이 집에서 태어나 1968년 77세를 일기로 역시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람의 관향(貫鄕)은 연안(延安)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공신(功臣)인 이귀(李貴)의 11대 후손이다. 7대조인 이사한(李思漢) 때 공주(公州)에서 연산(連山)으로 옮겨와 살다가 고조(高祖)인 이도술(李度術) 때 여산 원수리의 참수골(守愚齊 윗동네)이라는 마을로 이사했다.증조(曾祖)는 이선인데 문필로 천명(擅名)되었다. 조부(祖父) 이조흥(李祖興)은 호를 동우(東愚)라 하였는데 진사동(守愚齊가 있는 마을)으로 이사하여 수우제를 일으키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효행으로 도천(道薦)된 분이었다. 청렴하면서도 풍류로운 동우선생의 행덕은 손자 가람에게 지대한 연향을 미쳤다.선생은 시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시조의 현대적 혁신을 위한 새로운 운동을 펼쳤으며 스스로도 수 많은 시조를 창작한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역대+H12시조선』『가람문선』『국문학전사』등의 저서를 남겼다.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중국 사상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달아, 열 아홉 살에 전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6개월 만에 마쳤다. 1913년 관립 한성사립학교를 졸업한 후 남양, 여산 등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고서적을 수집하고 시조를 연구하고 짓기 시작했다.1925년 무렵부터는 봉천행, 한강을 지나며 등 시조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 여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여 시조혁신을 선도하고, 그 이론을 직접 실천하여 1939년『가람시조집』을 내놓았다.또한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여 1920년대부터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과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로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고향에 내려와 칩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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